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빌 카트라이트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파일:external/b-pocket.org/bill-500x371.png]]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1979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전체 3순위로 뉴욕 닉스를 지명한 카트라이트의 전성기는 아이러니하게 커리어 초창기였다. 그는 루키시즌 올스타에 뽑히며, 2년차때까지 2년 연속 평균 20점 이상을 기록했다. 5년차 시즌까지 화려하진 않아도 14~17점 정도 올려주던 주전 센터로 활약하던 그는 85-86시즌 중 심한 발 부상을 당하며 2경기 출장에 그친다. 이후 1985년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지명한 [[패트릭 유잉]]이 입단, 부상으로 인한 기량 하락으로 벤치플레이어 신세가 된다. [* 유잉의 입단으로 바로 백업으로 밀려난게 아니다. 와전된 것 중 하나인데, 유잉의 루키 시즌 당시 카트라이트는 발 부상으로 2경기에 그쳤으나, 부상에서 회복한 이후 그는 '''주전센터로 복귀했으며''' 유잉은 파워포워드로 뛰며 카트라이트-유잉의 트윈타워를 구축했다. 실제로 86-87시즌 당시 패트릭 유잉은 공식적으로 '''파워포워드'''로 분류되었다. [[https://www.basketball-reference.com/players/e/ewingpa01.html]] 프로 초창기의 유잉은 기동력이 좋았고 운동능력이 뛰어났고 당시 트렌드는 3점이 중시되지 않아 코트를 좁게 썼기에 그가 PF로 뛰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카트라이트의 기량은 이미 상당히 하락한 상태였고, 특히 득점력이 매우 떨어졌다. 결국 카트라이트가 중용된 건 86-87시즌이 마지막이었고, 87-88시즌부터 백업으로 전락하게 된다. 즉, 유잉의 존재로 백업이 된 것이 아니라, 기량하락의 문제로 백업이 된 것.] ||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f3294a2381a749a340b1c9094dc8c620.jpg|height=400]] ||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f5adcc9c3958ca7b8a1209ad2280f049.jpg|height=400]] || 1988년 6월 27일에는 찰스 오클리와의 트레이드 형식으로 시카고 불스로 이적하였다. 당시 불스에는 [[마이클 조던]], [[스카티 피펜]], [[호레이스 그랜트]]가 있었으며, 카트라이트는 윌 퍼듀를 제치고 닉스시절에 잃은 주전자리를 되찾았지만, 찰스 오클리와 트레이드 되었다는 사실때문에 조던의 불신임을 받아 팀내 적응이 쉽지 않았고, 때마침 바뀐 불스의 [[트라이앵글 오펜스]] 시스템에 적응하는 게 역시나 쉽지 않아서, 시스템을 변형하여 원래 링커역할인 4/5번 자리인 꼭지점을 조던이 차지하면서 전성기 시절과 상당히 달라진 수비 위주의 롤플레이어 역할로 불스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다. 어쨌든 베테랑 카트라이트는 이전까지 불스를 가로막던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악명높은 센터 [[빌 레임비어]]를 상대로 어려움을 겪던 불스의 골밑을 지켜냈고, 배드 보이즈를 꺾고 진출한 [[1991 NBA 파이널|1991년 NBA 결승전]]에서는 서부 컨퍼런스 챔피언인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를 누르고 생애 처음으로 NBA 챔피언을 달성했다. 그 후 [[1992 NBA 파이널|92년]]과 [[1993 NBA 파이널|93년]]에 3년 연속으로 NBA 챔피언에 등극했다. 한편 마이클 조던이 92-93시즌 끝으로 은퇴한 이후에는 플레이오프에서 뉴욕 닉스에게 패하고 말았다. 조던이 은퇴한 시즌에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조던의 훌륭한 파트너로 활약해온 [[스카티 피펜]]이 뉴욕과의 포스트시즌 제3경기 종료 상황에서 자신이 아닌 [[토니 쿠코치]]에게 마지막 슛을 쏘라는 작전이 나오자 피펜은 이에 불복해 아예 경기에 들어가는 걸 거부했다. 쿠코치가 득점에 성공해 시카고가 승리했지만, 이때 팀의 베테랑 리더였던 카트라이트는 경기가 끝나고 락커룸에서 피펜을 찾아가 분노의 눈물을 흘리며 피펜을 대차게 깠다고 한다.[* 당시 중계영상을 보면 피펜이 경기 투입 거부를 하고 벤치에 앉아있을 때도 (휘슬이 울리기 전까지) 카트라이트가 바로 옆에 앉아 계속 설득을 시도하는 모습과, 고집스럽게 반대쪽만 보는 피펜을 볼 수 있다.] 후에 피펜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후회는 없지만, 왜 카트라이트가 그렇게 반응했는지는 자신도 충분히 이해한다고 밝혔다.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e03539207a516aa214a33c5035a6f0c7.jpg]] 1994-95시즌에는 FA 신분을 거쳐 [[시애틀 슈퍼소닉스]]로 이적을 하여 29경기를 출전하였고, 시즌이 끝난 뒤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슈팅모션, 특히 자유투 쏠때 모션이 매우 특이했는데 공을 정면에서 올리지 않고 사이드로 삐딱하게 올려서 쏜다. 자유투할때는 삐딱하게 올라간다음 잠깐 멈췄다 쐈다. 이렇게 희한한 폼에도 불구하고 당대 센터 기준으로 점퍼가 있는 편이었으며 자유투는 커리어 통산 77%, 8할을 넘긴 적이 두번 있을 정도로 센터로선 정상급이었다. 조던이 제왕적이고 동료들을 극한까지 몰아세우는 리더였다면, 공동주장인 카트라이트는 동료들을 부드럽게 보듬어주는 리더였다. 말도 조용조용하고 성격도 온화해서 큰형같은 리더쉽을 보여준 선수. 참고로 이런 인격자를 열받게 해서 선빵 날리게 한 선수가 바로 그 유명한 [[빌 레임비어]]. 카트라이트는 80년대 선수치고 싸움을 많이 하진 않았는데 얼마 안되는 싸움 상대 중 레임비어와 [[아이제아 토마스(1961)|아이제아 토마스]], 그리고 [[데니스 로드맨]]이 있었다. 배드 보이즈가 얼마나 악명높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 다만 이런 인격자적인 면모에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었는데 바로 팔꿈치. 덩치가 크고 움직임이 굼뜬 카트라이트는 리바운드 경합이나 수비 도중에 팔꿈치로 '''의도치않게''' 다른 선수들을 가격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90-91시즌 도중 [[하킴 올라주원]]을 실수로 가격해 그가 실려나가게 만들 정도. 결국 하킴은 몇경기 결장해야했다. 그러나 [[칼 말론]]처럼 고의로 그러는 더티플레이어는 아니었는데, 평상시 행동도 그렇고 그는 상대 선수 뿐 아니라 '''동료들'''까지 실수로 가격하곤 했기 때문이다.[* 말론은 누가 봐도 대놓고 후려갈기는 반면 카트라이트는 플레이 도중 사고라는 게 명확했다.] 하킴 사건 이후 [[휴스턴 로키츠]]는 빡쳐서 리그 사무국에 정식 항의를 했고, 사무국은 카트라이트에게 보호대를 찰 것을 권고했으나 카트라이트는 자신의 경기리듬을 방해한다며 거부했다. 결국 커리어 내내 문제가 되긴 했지만 말론처럼 상습범도 아니고 고의라고 보기도 어려운지라 욕을 많이 먹지는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